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산성 전투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[[신라]]와 [[당나라]]의 [[나당동맹]]에 대항해 [[백제]]와 고구려는 [[여제동맹]] 관계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. 여제동맹이 실질적인 동맹관계가 과연 맞는지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, 660년 8월 백제의 멸망은 나당연합군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 하나가 줄어드는 것이고 고구려의 안보에도 나쁜 소식이었다. 그러나 백제 멸망 직후 옛 백제 땅에서는 [[귀실복신]] 등이 일어나 [[백제부흥운동]]이 진행되었고, 고구려는 백제 멸망의 보복으로 신라 북측을 공격해 백제 전선에 있던 신라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나아가 과거 신라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까지 조금씩 되찾으려 했다. 660년 10월에 있었던 [[칠중성 전투]]에서 고구려군은 칠중성 점령에 성공했고, 여전히 신라의 정예군이 백제부흥운동 진압에 쏠려있는 것을 본 고구려는 지금이 신라의 나라 안이 비어있어 공격할 기회라 보고 [[뇌음신]] 장군과 말갈인 장군 [[생해]](生偕)에게 명해 수륙으로 동시에 진격해 내려갔다. 먼저 공격한 것은 여주시 [[술천성]]이었지만 이기지 못하자 군사를 돌려 [[북한산성]]을 포위했다. 고구려는 그 서쪽에 진영을 두고 말갈은 그 동쪽에 주둔하면서 열흘 동안 공격했다. 뇌음신의 고구려군은 [[투석기]]를 설치해 돌을 날려 공격했는데, 북한산성 성주 동타천(冬陁川)은 [[마름쇠]][* [[말(동물)|말]]과 [[사람]]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땅에 깔아놓는 큼지막한 쇳바늘을 말한다.]를 바닥에 깔아서 적의 침입을 막고 망루와 노포를 설치하는가 하면 성안의 주민 남녀 2,800여명을 모두 동원하여 적과 싸우게 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하였다. 어린이와 노약자까지 격려하여 20여 일을 버텼다고 한다. [[북한산성]]은 점차 식량이 떨어져 곧 뇌음신에 의해 함락될 것 처럼 보였으나 때마침 고구려군의 진영을 향해 큰 별이 떨어지고 천둥과 비가 내리자 고구려군 역시 사기가 떨어져 싸움을 멈추고 돌아갔다. 이런 재난이 일어난 것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북한산성 성주 동타천이 하늘에 빌었기 때문에,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와 [[삼국사기]] [[김유신]] 열전에서는 [[김유신]]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일어난 일이라고 하고 있다. 꼭 누구 기도 때문이 아니라도 미신적 믿음이 중요시되던 고대라 기상현상에 사기를 고려해 퇴각했을 수도 있고, 악천후로 공성전 지속이 힘들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. 이 전투가 있던 음력 5~6월경은 딱 초여름 [[장마철]] 시즌이다. 동서고금 장마철은 쳐들어가기 좋지 않은 계절이지만 고구려 입장에선 백제 흡수에 신라군이 시선이 쏠린 타이밍을 노린 빈집털이였으므로 감수하고 군사를 일으킨 것인데 동타천이 생각보다 잘 버텨 결국 큰 비에 좌절한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